2008년 08월 21일
diamond dust - 2
인간위에 군림하는 마물, 그리고 그 마물 중에서도 상위 지배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벨가의 저택은 위용이 남달랐다. 웅장한 석조건물에는 언제나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마물, 인간들이 있었지만 언제나 발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는데, 이런 벨 가문의 저택도 가끔은 품위를 깨는 경우가 연출되기도 했다. 레이라는, 그런 경우가 지금 자신 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마음 아팠다.
"으흐흑-! 레이라님! 저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 제발, 그것만은 아니어라.
정적을 깨는 두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달려오더니, 무방비 상태인 레이라에게 덥썩 매달린 것이었다. 공기처럼 소리 없이 걷던 하인, 하녀들의 시선이 쏠렸다. 모두들 레이라의 눈짓에 다시 발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시끄럽게 훌쩍거리는 소리에 연신 흘끔거리는 것 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덕분에 좀처럼 동요하는 일이 없는 레이라도 약간은 당황해서 매달려오는 인물의 팔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팔에 매달린 노부인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악력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우아하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고급스러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노부인은 통칭 그레타 부인. 그녀는 우아한 문체로 이름 높은, 고대어와 문학 부문의 유명인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갓슈 도련님의 교육담당. 여기까지 생각하자 사태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러나 예의상, 레이라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달래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레타 부인?"
"그, 그게… 갓슈님께서…."
역시. 예상했던 대답을 들려줄 것만 같아 레이라가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레타 부인은 손을 마구 내저으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닙니다! 모두 이 못난 늙은이의 미숙함입니다! 용서해주세요, 레이라님. 흑흑…모든 것은 제 불찰이에요…."
"그런 소리 마세요. 부인께서 미숙하면 갓슈 도련님은 대체 어떤 분에게 수업을 들으셔야 하는 겁니까?"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갓슈님께서 제 수업을 싫어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은요. 그래서, 그래서 말입니다 레이라님…"
결론은 간단했다. 갓슈 도련님을 가르칠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면서 그레타 부인은 저택 밖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역시 교양있는 여성 마물의 표본. 어떤 경우에도 인사는 절대 잊지 않는다.
레이라는 닫혀버린 현관문을 바라보며 아까보다 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신기록 성립. 금색의 작은 도련님은 2주일만에 세 명의 가정 교사를 내쫓아버린 것이었다. 분명히 은색의 도련님도 가정교사를 고르는 데는 까다로웠지만 그것은 좀 더 높은 수준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쫓아내는 막무가내 도련님을 상대하다보면, 천하의 레이라도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 힘들었다. 그녀는 피곤한듯, 보랏빛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제온 도련님께 보고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로부터 3일 후의 이야기.
갓슈는 고이 자란 부잣집 도련님답게 어리광이 많았다. 그만큼 정도 많아서 이것 저것 주워오는 것을 잘했는데, 아마 그가 주워오는대로 동물들을 전부 받아주었다면 정원을 동물원으로 꾸며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온-그의 쌍둥이 형은, 생긴것은 그야말로 판박이건만, 잔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차가운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남자 인간을 주워왔을 때 저택은 이런저런 말들로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었다.
레이라는 그가 낯선이와 함께 저택에 들어서던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휘릭, 하고 늘 그렇듯 순간이동을 끝낸 제온이 망토를 펄럭이자, 그 사이에서 나온 것은 의외로 인간이었다. 그것도 처형 예정이었던 사형수. 모두들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경악으로 눈을 휘둥그레 뜰 수 밖에 없었다. 잠시 멍해있던 레이라는 황급히 인사를 하러 달려나갔고, 여느 때처럼 그녀의 인사를 대강 받고 스쳐지나가며 작은 주인님은 한 마디를 남겼다.
"알아서 부려먹어."
…그다지 다정하게 대할 생각으로 데려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벨 가의 저택에서 부릴 생각이신듯 하니, 밑에서 일하는 몸으로 명령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이봐."
그러나 예의를 갖추고 막 그를 데려가려는 찰나, 다른 이들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 하는 작은 주인님 앞에서 인간은 망발을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례한 부름에 제온이 우뚝 멈춰서고, 홀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하는 소리를 눌러 참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작은 주인님의 은빛 눈썹이 꿈틀거리는 돌아보는 광경은 언제 봐도 심장이 떨렸다. 세간에 말하길, 벨 저택에서 일하는 건 위궤양을 직업병으로 각오해야한다고 하던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이만 보내주지 않겠어?"
"돌아가면 죽을텐데."
그 인간도 꽤나 독종이었다. 마물 앞에서, 그것도 벨 가문의 장자 앞에서, 남루한 옷을 걸친 인간은 삐딱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검은 눈빛은 '그래서 어쩌라고'의 포스를 강하게 내뿜고 있었다.
제온은 잠시 고민했다.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죽기 직전의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준것은 무례한 행위에 속하는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을 동원해봐도 답은 '아니다'였다. 그는 다시 한 번 눈을 들었다. 검은 눈동자는 거리낌 없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편이… 훨씬 나아."
살아있는 채로 괴로운것 보다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제온의 귀로는 또렷이 들렸다. 그 의미 모를 말이.
점차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 짓도 아니고-솔직히 말하면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 다. 하지만 어쨌든 목숨을 살려줬는데. 저 놈은 왜 자꾸 죽으려고 하는걸까. 무언가 울컥 하는 기분이다. 제온은 이 생소한 감정이, 약간 다른 종류의 분노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저 인간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분명히.
여기까지 생각하고 난 제온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름은?"
"……."
대답은 없었다. 그는 약간 불쾌한 얼굴로 제온의 얼굴을 바라볼 뿐, 굳게 다문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울컥한 제온의 감정이, 파지직 거리는 은빛 전격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본 레이라는 뒤에 선 하녀들에게 눈짓을 해 자리를 피하게 했다. 제온의 위압감에 굳어있던 이들이 황급히 빠져나가고, 홀에는 레이라와 제온, 그리고 검은 머리의 인간만이 남았다.
"사소한 걸로 일일이 피곤하게 하지 마. 눈 한쪽이 날아가야 말 할 기분이 들겠나?"
어느 새 그의 얼굴까지 바짝 다가온 제온의 손은 위협적으로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손가락이 오른쪽 눈을 찌를것 처럼 다가갔는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불쾌함, 그 이상도 이하의 것도 아니었다.
"타카미네 키요마로."
청아한 목소리는 떨리지도 않았다. 그가 대답한 이유는 공포 때문이 아니라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대답에 놀란 것은 오히려 제온과 레이라였다.
"어머."
"타카미네라고?"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온은 자신도 모르게 주술을 거두고 있었고, 레이라는 동그래진 눈동자로 지저분한 인간 남자를 바라보았다.
타카미네 키요마로. 그는 마물들 사이에서도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마물이 인간들의 나라를 습격하기 전, 그의 집안이 유력한 가문이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절대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으로 마물의 모든것을 가장 근접하게 연구한 천재 중의 천재. 실제로 능력면에서 마물과 비교도 하지 못 할 정도로 미약한 인간이 5년 동안이나 전쟁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그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전쟁 종료 후, 숙청 제 1 대상이 되었지만 그 행방이 묘연해져 있던 상태였다.
"확실히 그 타카미네 키요마로가 흑발 흑안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제온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저분한 남자의 차림새를 훑으며 말 끝을 흐렸다. 그러자 눈 앞의 남자는 망설임 없이 손에 끼었던 반지를 빼서 그에게로 던졌다. 가볍게 손 안으로 날아든 반지에는 어떤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제온이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는 동안, 레이라는 흥미어린 눈초리로 타카미네를 관찰했다. 그로 인해 들려오는 무수한 패전소식을 접한 그녀로서는, 눈앞에 선 여려보이는 청년이 '그' 타카미네 키요마로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사실이라면 정말 생각도 못 한 거물이로군요."
"…가짜다."
"예?"
제온의 중얼거림에 반문했을 때, 그는 이미 타카미네에게 반지를 다시 던져주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짜증난다는 어투로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가짜라고. 그 인장반지."
"말도 안돼!"
반응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이마에 혈관까지 돋운 채 타카미네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여태껏 담담하던 태도는 어디에 갔는지, 그의 눈동자는 일렁이는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씩 제온과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손만 닿는다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갑작스런 변화에 멍하니 보고 있자니, 여지껏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날 모욕하지 마라. 눈 크게 뜨고 봐! 이게 어딜 봐서 가짜지? 애초에 뭘 알고나 말 하는건가? 어린애 주제에, 못 알아보겠으면 못 알아보겠다고 순순히 인정해. 꼴사납다!"
"시끄러."
타카미네 키요마로-라고 주장하고 있는 남자의 말을, 제온은 한 마디로 일축 해버렸다. 그 주위에 흐르던 공기가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미미하게 전기를 띄기 시작하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발언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순간, 겁없이 그에게 다가가던 남자가 본능적으로 움찔, 하는 것이 보였다.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라도 이 압박감은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자신이 한 순간이나마 위축되었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안든다는 듯, 까드득 하고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계속되던 신경전은 제온이 싸늘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끝맺었다.
"레이라."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 해 지켜만 보던 레이라가 그의 부름에 얼른 고개를 숙여보여 답했다.
"'저건' 이제부터 여기서 일 할테니, 잘 곳을 알려줘."
"이봐! 그렇게 멋대로…!"
항의하려던 타카미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 했다. 제온의 모습이 갑자기 눈 앞에서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뒤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평균 체온보다 1도는 낮은 것 같은 차가운 팔이 어느 새 그의 목을 감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말이야… 엄연히 여기는 내 저택이지. 그리고 이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내 소유. 그리고 넌 '이름도 없이' 내 저택에 발을 들였지."
"제멋대로군..타카미네 키요마로라고 했을텐데 그 새 잊었나?"
"그건 인정할 수 없으니까."
"이…!"
분에 못 이긴 키요마로가 팔을 들어 강하게 휘둘렀지만 안타깝게도 별 어려움 없이 제온의 손에 잡혀버렸다. 상대는 마물, 게다가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였다. 당연히 힘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키요마로는 온 힘을 다 해 몸을 비틀며 그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것을 여유있게 제압하고 있던 제온의 얼굴에 냉소가 걸렸다.
"좋아. 그렇게 우기고 싶다면 '키요마로' 정도는 인정 해 주지."
귓가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절대로 풀리지 않을것 같던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키요마로는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흰 망토를 펄럭이며 그를 지나쳐 걸어가는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제온은 예를 갖추는 레이라에게 손짓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레타 부인의 자리는 저녀석에게 맡겨버려."
"예? 제온님, 그게 무슨…!"
"저렇게 허약해서야, 힘 쓰는 일에는 부리지도 못 하잖아?"
당황해서 소리치는 레이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제온은 계단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가장 골치 아픈 건 은색의 도련님일지도.
# by | 2008/08/21 02:28 | 망상_글 | 트랙백 | 덧글(2)










